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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모아모아 2019. 8. 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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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최초의 대격돌! : 페르시아 전쟁 (BC 492년 ~ BC 448년) ⑤


『전쟁의 간주곡 (Interbellum)』

[영화 '300 : 제국의 부활' 중 테미스토클레스]



1. 아테나이 : 테미스토클레스의 등장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적은 숫자로 페르시아의 대군을 훌륭하게 물리친 헬라스 인들은 엄청난 역량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소문과는 달리, 페르시아 군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3차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는 BC 480년까지 약 10년간 양국의 적대적인 관계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 합니다.

마라톤 전투 직후, 영웅 밀티아데스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추천에 힘입어 최고 집정관인 '아르콘(Archon)'에 선출됩니다. 그는 바로 페르시아 군의 재침공에 대비하여 이오니아와 아티카 반도 사이에 있는 퀴클라데스 제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클라데스 제도에 속해 있는 섬나라 대부분이 이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밀티아데스와 그 추종자들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해군기지를 건설해야한다고 강경입장을 고수합니다. 결국 민회에서 밀티아데스의 손을 들어줍니다.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는 한 군데에만 타격을 입히면 다른 나라들은 해군기지 건설에 저절로 동의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마라톤 전투 직전에 페르시아 함대의 편에 서서 아티카 반도로 향하는 뱃길을 열어준 파로스 섬(Paros)을 본보기로 정하고 그 곳을 향해 함대를 진격시킵니다. 그러나 파로스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얕잡아 본 밀티아데스는 별 소득없이 큰 부상만 입은 채 철군하고 맙니다.

밀티아데스의 파로스 섬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테나이 정계에는 밀티아데스의 실정을 문제삼고 그를 축출하려는 분위기가 생깁니다. 특히, 지난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히파아스를 몰아내고 아테나이에서 참주정을 끝내는데 큰 공을 세운, 아테나이의 유서깊은 귀족 알크마에온 가문이 밀티아데스의 축출에 앞장섰는데, 그들은 민회에서 "밀티아데스는 위험한 계획으로 무리한 원정에 나서 실패함으로써, 국가는 물론, 시민 여러분의 소중한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공만을 위해 이 모든 계획과 원정을 무모하리만치 강행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여러분을 속인 사기꾼에 불과합니다!"라고 주장하며, 시민들에게 밀티아데스를 축출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로부터 수 일 후,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 원정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고 맙니다.

밀티아데스가 죽자, 아테나이의 정계는 잠시 공백상태에 빠집니다. 이때 아테나이에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는데, 바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입니다. 훗날 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전(決定戰)으로 평가받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의 영웅이자 밀티아데스의 정적(政敵)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알크마에온 가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아르콘에 선출됩니다.



2. 테미스토클레스 VS. 아리스티데스


"고귀한 아테나이 시민들이여! 저 동방의 이방인들이 완전하게 물러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족속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머지않아 다시 우리 헬라스의 땅을 탐할 것입니다! 저들은 더 많은 병사들과 함대를 이끌고 와서 어머니 가이아의 고귀한 유산들을 철저히 파괴할 것이고,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남김없이 약탈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을 무참히 유린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우리는 손놓고 있어야 합니까?"

이처럼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재침공을 확신하면서 철두철미한 자력방위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시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고 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 해군에 대한 군비증강(軍備增强)만이 페르시아의 재침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육군 양성에 주력하면서, 페르시아와 외교적인 해법으로 양국간의 균형을 잡고 전쟁 발발을 막자는 주장을 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테미스토클레스의 강경민중파(強硬民衆派)와 아리스티데스의 온건귀족파(穩健貴族派)의 대립은 과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



결국, BC 485년, 두 사람은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로 결판을 내기로 하고, 투표를 시작합니다. 원래 '도편추방제'는 클레이스테네스가 참주의 출현을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위험인물로 지목한 사람을 10년 간 아테나이에서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이 차츰 그 취지와 기능이 확대되어, 페르시아 전쟁 당시부터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나 정책을 결정할 때 마지막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즉, 대립하는 사안이나 정책의 입안자 중 한 사람을 도편 추방함으로써, 합의된 의결사안에 대해 불복의사의 표현이나 그로 인한 반란 등을 원천 봉쇄한다는 취지로 도편추방제를 확대 적용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도편 추방을 당한 사람은 아리스티데스였습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투표 날, 테미스토클레스를 지지하는 어느 문맹 시민이 투표장에 왔습니다. 글을 쓸 줄 몰랐던 그는 누군가에게 대신 도편에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할 참이었습니다. 마침 옆을 지나던 한 사람에게 그는 도편을 내밀며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글을 모릅니다. 여기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좀 적어주세요."
부탁을 받은 그 사람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문맹 시민을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그리고는 문맹 시민에게 물었습니다.
"아리스티데스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니요." 문맹 시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난 그가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든 그를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듣는 것이 너무 짜증이 났소! 세상에 정말 공명정대한 사람이 있긴 한 거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신이겠지!"
그 대답에 부탁을 받은 사람은 박장대소를 하며 도편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자기 이름을 적었더랍니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 아리스티데스의 인성은 나름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는데요. BC 480년 초반에, 아테나이에서는 외국군의 침공에 대한 방위를 위해 필요하다면 도편 추방자들을 소환하는 법령이 통과됩니다.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이 법령에 의해 추방된 지 5년만에 아테나이로 돌아와 장군으로 선출, 살라미스 해전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부장으로 맹활약을 펼칩니다. 아리스티데스는 이후에도 언급되니 그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겠습니다.

이제 정적을 추방한 테미스토클레스는 군비증강을 위해 본격적인 자금확보에 나섭니다. 그는 아티카 반도의 라브리온(Lavrion) 광산과 아테나이와 동맹관계에 있는 암피폴리스 근처 식민시의 광산으로부터 얻은 수익 중 2/3를 국고로 귀속시키고 이를 통한 자금력으로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추진합니다. 이로써 BC 480년 무렵, 아테나이 해군의 함대는 마라톤 전투 당시보다 약 4배 많은 460여 척 규모로 확장·강화되었습니다.



3. 라케다이몬의 레오니다스


한편,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는 BC 491년에 권력다툼에서 데마라토스 왕(Demaratos)이 축출되고, 그의 사촌인 레오튀키데스(Leotykides)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에 굴욕감을 느낀 데마라토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다레이오스 1세의 고문으로 활약합니다.

전통적으로 라케다이몬의 왕위는 에우뤼폰티다이(Eurypontidai) 가문과 아기아다이(Agiadai) 가문에서 각각 한 명씩 두 명이 올랐는데, 앞서 소개한 레오튀키데스는 에우뤼폰티다이 가문의 왕이었고, 당시 아기아다이 가문의 왕은 클레오메네스 1세(Kleomenes I)였습니다. 클레오메네스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이상 행동이 문제가 되자 가족들에 의해 감금된 후, 자살하고 맙니다. 이때 클레오메네스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그의 이복 동생인 도리에오스(Dorieos)도 시켈리아(Sikelia, 오늘날 시칠리아 섬)에서 객사하자, 왕위는 도리에오스의 동생에게 돌아갑니다. 그가 바로 영화 '300'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테르모퓔라이 전투의 영웅인 '라케다이몬의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 입니다. 이때가 BC 489년(또는 488년이라고도 함)의 일입니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 자크 루이 다비드]



위로 형들이 많았기에 레오니다스는 본래부터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타고난 전사 체질이었던 그는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손수 아고게(Agoge)에 들어가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라케다이몬의 모든 남성들은 7살에 아고게라는 아주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6년 간 기초 훈련과 교육을 거치고 나면, 본격적인 훈련은 13살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때부터 19살까지 머리는 짧게 잘라야 하고, 신발은 신어서는 안되며, 단 한 겹의 옷만으로 사계절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숙식은 거의 자연에서 해결해야 했죠.

19살이 되면, 에이렌(eiren)이라는 계급이 되는데, 이때부터는 전투에 직접 참전하는 것이 가능했고, 소년병으로 이뤄진 소대의 소대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24살에 이르면, 비로소 정규군에 편성되는 정식 전사가 되며, 30살부터는 시민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병영을 벗어나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전시에는 총동원령에 의해 다시 병영에 집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아들들은 기본적으로 아고게를 면제받고 따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는 행여라도 아고게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다칠 경우를 대비해서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는 통상의 관례를 깨고 아고게를 직접 체험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레오니다스는 이복형이자 선왕(先王)이었던 클레오메네스의 딸인 고르고(Gorgo)와 결혼했는데, 영화 '300'에서 레나 헤디가 연기한 인상적인 왕비가 바로 고르고입니다. 왕위에 오른 레오니다스는 레오튀키데스에게 내정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 군의 재침공에 대비하여 군비증강에 힘쓰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껏 육군에만 집중했던 관례에서 벗어나, 시켈리아 식민시들의 도움을 받아 함대 증축을 추진합니다. 이때 증축한 함대가 헬라스의 연합함대에 합류하면서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활약을 하기도 합니다.



4. '왕들의 지배자' 크세르크세스


한편, 마라톤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페르시아는 어떤 상황일까요? 마라톤 전투에서 약 절반의 병사들을 잃은 다레이오스 1세는 화병이 나고 맙니다. 그는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여 설욕전을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그런데 BC 486년, 이집트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합니다. 다레이오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던 와중,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그의 나이 64살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인물이 영화 '300'에서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 36살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크세르크세스'는 우리말로 '왕들의 지배자'이라는 뜻인 고대 페르시아 어 '𐎧𐏁𐎹𐎠𐎼𐏁𐎠(흐샤야르샤)'의 헬라스 번역어입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출생이 흥미로운데, 그의 아버지는 다레이오스 1세였고, 어머니는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퀴로스 대제의 딸 아토사(Atossa) 였으므로, 크세르크세스는 퀴로스 대제의 증손자이자 외손자인 셈입니다.

  • 출처 - 역사랑 놀자


여하튼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군대를 이집트로 몰아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아케메네스(Achaemenes)를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하고 혹독하게 다스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BC 484년부터 2년 간 발생한 바뷜로니아 인들의 반란 역시 폭력적으로 진압합니다.

부왕보다 더 강하고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크세르크세스는 선왕들이 취했던 점령지에 대한 회유책을 전격 철회하고 각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와 습속, 자율적인 삶조차도 무시하고 철저히 페르시아 화(化) 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폄으로써, 강력한 전제정치를 시작했습니다.

BC 480년, 마침내 모든 제국 내 반란과 내정을 다잡고 나자,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가 못 다 이룬 헬라스 원정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 식으로 표현하자면) 페르시아 제국 방방곡곡에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페르시아여! 집결하라! (Persia! Assemble!)"

이제 10년 간의 전쟁의 간주곡이 끝나고, 또 다른 전쟁의 서곡이 멀리서부터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 참고서적

- '역사', 헤로도토스 著, 천병희 譯, 숲출판사
-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著, 이순호 譯, 책과함께
- 'The Greco-Persian Wars', Peter green 著,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The Greek and Persian Wars, 499–386 BC.', Philip de Souza 著, Osprey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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