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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 인도 - 바스코 다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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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모아모아 2019. 9. 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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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닿음으로써 그때까지 세계 무역을 독차지해온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고, 지중해밖에 모르던
유럽의 역사에 세계 모든 곳이 뱃길로 이어지는
바다 시대 가 열렸다.

역사의 물길을 바꾸다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1488~1498년)

1487년, 디아스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기 위해 리스본을 떠난다.

다음해 폭풍에 휩쓸려 포기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희망봉을 발견한다.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의 항로를 이어받아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인도항로는 유럽의 동방 무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481년 포르투갈 왕이 된 주앙 2세는
작은 할아버지 엔리케 왕자의 뒤를 이어
바다 탐험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1485년 주앙 2세의 명을 받고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간 디오구캉은 적도를 넘어 콩고를 발견했다.

1486년에는 크리스트교도인 프레스터 존 왕이 아시아에서 아비시니아로 옮겼다는 소문이 전해 왔다.

주앙 2세는 프레스터 존을 찾으려고 아비시니아와 인도로 가는 탐험대를 두 갈래로 보냈다.

뭍길은 아라비아 말을 잘하는 페루 다 쿠비양이,
물길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맡았다.

디아스는 1487년 8월 캐라벨 2척과 보급선 1척을 이끌고 리스본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면 그 항로의 중간 보급 기지를 만든 뒤 프레스터 존을 만나 동맹을 맺으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몇 달을 남하하던 디아스 선단에 엄청난 폭풍이 덮쳤다. 1488년 1월 6일이었다.

디아스는 바위에 부딪칠까 봐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항해했다. 며칠 뒤 뱃머리를 왼쪽(해안)으로 돌렸는데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나아가도 육지는 없었다
(이 때 그들은 아프리카 남쪽 끝에 뾰족 튀어나온 곶을 멀찍이 돌았다. 희망봉을 못 보고 지나친 것이다).

그들이 육지를 본 때는,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린 1488년 2월 3일이었다. 오늘날 포트엘리자베스라 불리는 안그라데상브라스 만이었다.

그들은 어느덧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들어서고 있었다. 디아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북상했으나 지친 선원들은 돌아가자고 우겼다.

디아스는 며칠 더 항해하여 인도로 갈 수 있는 뱃길이라는 믿음이 생기자 뱃머리를 돌렸다.

그 해 5월, 돌아가는 길에 디아스는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에 튀어나온 곶을 보았다.

그는 폭풍 때문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그곳을
'폭풍 곶'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대서양과 인도양의 바람이 맞부딪치는
그곳의 물결은 몹시 사나웠다
(역사 기록에는 뒷날 주앙 2세가 선원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려고 '희망봉'이라 고쳐 불렀다고 되어 있지만,

나중에 디아스 선단에 합류한 두아르테 파셰쿠는 그 이름을 디아스가 붙였다고 주장했다).

디아스 일행은 포르투갈을 떠난 지 열여섯 달 만인 1488년 12월에 리스본으로 귀항했다.

디아스가 주앙 2세를 만나러 갔더니
콜럼버스가 와 있었다.

콜럼버스는 4년 전 주앙 2세를 찾아와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로 갈 테니 배 3척과 선원에다 1년치 보급품을 주고,

자기를 인도의 부왕(副王)으로 삼아 달라고
제안했다가 주앙 2세가 이를 거절하자 스페인 왕을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거절당하자
다시 포르투갈로 온 길이었다.

디아스가 주앙 2세에게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았다고 보고하자 콜럼버스는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남단 항로를 발견한 뒤로도 주앙 2세는 육지로 보낸 쿠비양을 기다리느라 9년을 그냥 보냈다.

그 사이에 콜럼버스가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섬들이 포르투갈 영토인 아조레스 군도와
가깝다는 사실을 들어 주앙 2세는 신대륙이
포르투갈 땅이라고 우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를 두고 다투다가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포르투갈은 신대륙을 포기하는 대신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와, 아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브라질을 차지하기로 했다.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1488~1498년)

1487년, 디아스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기 위해 리스본을 떠난다. 다음해 폭풍에 휩쓸려 포기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희망봉을 발견한다.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의 항로를 이어받아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인도항로는 유럽의 동방 무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1484년 /
<동국통감> 완성, 창경궁 준공1487년 / <동국여지승람> 간행1498년 /
무오사화



그들은 어느덧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들어서고 있었다. 디아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북상했으나 지친 선원들은 돌아가자고 우겼다.

디아스는 며칠 더 항해하여 인도로 갈 수 있는 뱃길이라는 믿음이 생기자 뱃머리를 돌렸다.



실제로 대서양과 인도양의 바람이 맞부딪치는
그곳의 물결은 몹시 사나웠다(역사 기록에는 뒷날 주앙 2세가 선원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려고 '희망봉'이라 고쳐 불렀다고 되어 있지만, 나중에 디아스 선단에 합류한 두아르테 파셰쿠는 그 이름을 디아스가 붙였다고 주장했다).

디아스 일행은 포르투갈을 떠난 지 열여섯 달 만인 1488년 12월에 리스본으로 귀항했다.

디아스가 주앙 2세에게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았다고 보고하자 콜럼버스는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남단 항로를 발견한 뒤로도 주앙 2세는 육지로 보낸 쿠비양을 기다리느라 9년을 그냥 보냈다.

그 사이에 콜럼버스가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섬들이 포르투갈 영토인 아조레스 군도와 가깝다는 사실을 들어 주앙 2세는 신대륙이 포르투갈 땅이라고 우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를 두고 다투다가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포르투갈은 신대륙을 포기하는 대신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와, 아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브라질을 차지하기로 했다.


뱃사람 중의 뱃사람

희망봉 근처에 건설된 케이프타운 시 시청 옆에
서있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 동상.

그는 더 멀리 더 오래 항해할 수 있도록 사상 처음으로 보급선이 딸린 선단(船團)을 만들어 항해했다.

1495년 포르투갈 왕이 된 마누엘 1세는 디아스는 찾은 항로를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왕은 그 일을 바스코 다 가마에게 맡겼다.

1460년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가마는, 좀 거친 성격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항해술에다 용기와 외교 능력도 갖춘 적임자였다.

2년을 준비한 끝에 가마는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떠났다.

선단은 기함 상가브리엘호(120톤) 상라파엘호(120톤) 베리오호(50톤)와 보급선 1척(200톤)으로 짰다.

배에는 3년치 식량을 싣고, 선원 168명을 태웠다.

7월 15일 카나리아 군도를 지난 가마의 선단은 얼마 못 가 짙은 안개를 만나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용케 베르데 곶 앞바다에서 다시 만났다.

특기할 일은, 가마가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내려가지 않고, 경험자인 디아스가 말한 대로 대서양 가운데로 멀찍이 돌아서 내려갔다는 점이다.

그로써 가마는 기니아 만의 무풍(無風) 지대와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무역풍 맞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11월 22일 희망봉을 지난 가마는 이듬해 4월 14일 말린디에서 인도 항로를 아는 안내인을 태우고 아라비아 해를 건너 5월 20일 인도 캘리컷에 닿았다.

가마는 캘리컷에서 힌두 통치자 사마린을 만났으나 조약을 맺지는 못했다. 가지고 간 물건들이 조잡한 데다 인도에서는 별로 수요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해 8월 향료만 조금 구해서 캘리컷을 떠났다.

인도에 갈 때는 5월이어서, 아프리카에서 인도 쪽으로 부는 여름 몬순(계절풍)을 타고 아라비아 해를 쉽게 건넜으나, 돌아올 때는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아 몬순이 방향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맞바람을 받으며 항해했다.

이 때문에 지그재그로 항해하느라,
갈 때 23일 걸린 아라비아해를 올 때는 석 달 만에 건넜다. 이처럼 항해가 길어지자 괴혈병 환자가 속출했다.

1499년 9월 9일 가마 선단이 리스본에 입항했을 때, 2년 2개월에 걸친 대항해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55명이었다.

1502년 2월 가마는 10척으로 짠 함대가 이끌고 다시 인도로 떠났다. 인도양에서 재해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도에 도착하자 캘리컷과 아랍의 연합 함대를 격퇴한 뒤 1503년 2월 20일 군함 5척을 캘리컷에 남겨두고 포르투갈로 귀환했다(식민지에 함대를 주둔시킨 일은 이것이 처음이다).

1524년 9월 가마는 인도 총독이 되어 세 번째로 인도 땅을 밟았다.

그는 전임 총독 시절에 빚어진 갖가지 행정적 혼란을 바로잡는 데 온힘을 쏟다가 과로하여, 인도에 취임한 지 석 달 만인 1524년 12월 24일에 죽었다.

가마가 세 차례 항해하면서 인도 항로를 개척한 일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지배하고, 멀리 중국 · 일본과도 거래하게 되었다.1)

그때까지 향신료 무역을 독차지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베네치아 · 제노바 · 피사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이 시장에 내놓은 후추 값이 그들이 5분의 1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도시 국가들이 육로로 수입한 향신료는 중동 지방을 거치면서 이슬람교도에게 엄청난 통행세를 물었으므로 값이 비쌌다).

이로써, 에게 문명으로부터 그리스 ·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지중해가 중심이 되어 온 유럽 역사는, 세계의 모든 곳을 뱃길로 잇는 '바다 시대'를 맞게 되었다.

흔히 콜럼버스를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가마의 업적에는 훨씬 못미친다.

콜럼버스는 고작 36일간 순풍을 받으며 4천여 km를 항해했지만, 가마는 더운 바다와 추운 바다를 번갈아 지나고 이슬람교도와 싸우며 열 달간 3만 8,000km를 항해했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으려다가 이름 없는 섬들을 발견했지만, 가마는 처음에 목적한 대로 인도까지 갔으며, 약속한대로 세계의 무역 판도를 바꾸었다.

그만한 거리,
그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ㅡ 가마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로 가려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향신료 때문이에요.
당시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인도와의 무역을 독차지해 향신료가 무척 비쌌어요.

그런데 다 가마가 인도에 가서 무역 협정을 맺으면, 포르투갈은 싸게 향신료를 들여올 수 있었지요. 포르투갈은 이렇게 향신료를 사와서 다른 유럽 나라에 비싸게 팔 생각이었어요.

항해에 나선 다 가마는 무사히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났어요.

그리고 오늘날 케냐에 속하는 말린디 항까지 갔지요. 그때까지 유럽 사람 중에는 아

무도 말린디 항 너머로 가 본 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인도의 지리를 잘 아는 아랍인 항해사를 구해 다시 길을 떠났지요.


네이브캐스트
세계사인물사전

  • 출처 -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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