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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생활정보

삼국지 인물열전 - 제갈량 , 조운

by 모아모아모아 2019.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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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의 인물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 제갈량 ’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파고들어가 보면 전반부는 조조, 후반부는 제갈량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
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세 사람, 즉 유비와 조조, 그리
고 제갈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삼국지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갈량
에 대해서는 잘 ㅂ살펴보고자 한다.

제갈량(諸葛亮). 자는 공명(孔明), 삼국지연의에
의해 거의 신격화된 사람으로, 주 문왕 서백후를 도
운 강태공(여상),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장자방(장량)
과 함께 오천 년 중국사에서 3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찍 부모를 여읜 제갈량 형제들은 숙부와 함께 양
양의 융중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거기서 주경야
독하면서 가슴속의 이상을 키워가고 있다가, 형 제
갈근은 오나라로 건너가 손권의 참모가 되었고 제갈
량은 유비를 섬기는 촉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안 조카 제갈탄은 위나라의 장수
로 있으면서 후일 사마소의 찬탈기도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당시 ‘ 오는 호랑이
를 얻고 촉은 용을 얻었는데 위는 개를 얻었다.’ 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갈량이 세상에 나온 것은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
다. 제갈량이 주로 경세(經世)를 겨냥한 학문을 익
혀왔고, 당대의 재사들과 교유(交遊)를 통해 천하대
세를 가늠할 식견과 안목을 기르고 있었다는 점, 스
스로를 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로 비유
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명
문가와 결속 맺고 신분상승을 꾀함도 그가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제갈량
의 장인은 그곳 호족인 명사(名士) 황승언, 장모는
형주 제일의 명문 채씨 집안 딸로서 형주자사 유표
의 부인과 자매였다.

제갈량은 분명히 세상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고 했다. 그리고 이미 확고한 터전과 많은 인재를 보
유한 조조와 손권보다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유비를 주군으로 택했다. 제갈량은 유비
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명하면서 서촉에서 기업(基業)하여 오와 힘을 합쳐 위를 공략
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약관 27세의 제갈량이 혜성처럼 등장한 후부터, 한
때 천하을 석권했던 조조가 참담한 좌절함은 물론,
삼국지 주역자리도 그에게 빼앗기고 만다. 적벽대전
에서 손권과 유비의 5만 연합군이 조조의 백만 대군
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명장 주유의 공이 크지
만, 그것도 제갈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기도로 동남풍을 불게 하고, 공성(空城)에
서 거문고 하나로 적의 대군을 물리치기도 하고, 또
축지법으로 추격하는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
다. 그의 행적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부풀려진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 제갈량이 왔다가 울고 가겠다.’ 는 말이 있다. 상대
방의 뛰어난 지략에 놀란 제갈량이 자신의 무능함에
한탄하겠다란 뜻으로, 지혜와 책략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제갈량이 지략의 대명사임
을 방증하는 속담이다.

▶ 제갈량의 기량을 정치가와 군략가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 먼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어리석은 촉주 유선을 하늘처럼 받들고 충성을 다하
는 모습에서 명재상으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국
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똑똑한 2인자가 아둔한 1인
자에게 충성을 다함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안으론, 승상의 지위에 있슴에도 크고 작은 일 모두
에 관여했던 점을 드는 사람이 많다.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부족했고 상벌이 엄
격하고 공평무사했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을 해야 하
지 않을까 싶다.

= 군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촉의 5~6배에 달하는 위 국력을 감안하면, 앉아서
망하느니 싸워 활로를 찾는 전략을 택한 것은 분명
현명한 판단이다. 결국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6차에
걸쳐 공세를 취한 사실만로도 그가 뛰어난 군략가임
을 인정해야만 한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적장 사
마의가 시종일관 수비에 치중한건 그 때문일 것이다.

첫 북벌 때 용장 위연이 제안한, 지름길로 장안을 치
는 기습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
분이다. 안전 위주의 지지않는 전략으로 일관한 제
갈량의 입장에선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전쟁
에는 도박도 필요한 법이다.

위와 전투에서 제갈량은 여러차례 신출귀몰하는 지
략을 펼치지만, 결국 패하고 만다. 분골쇄신하던 제
갈량, 드디어 오장원에서 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54세, 병명은 과로로 인한 폐결핵으로 추
측하고 있다. 그가 죽자, 그와 함께 중원을 다툰 위의
명장 사마의는 이런 말을 남긴다.

“ 공명은 참으로 천하의 기재이다. ”

제갈량이 삼국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삼고초려(三
顧草廬)를 필두로, 수어지교(水魚之交), 만두(饅
頭), 칠종칠금(七縱七擒), 출사표(出師表), 읍참마
속(泣斬馬謖)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된, 요즘말로 뉴스메이
커였던 셈이다.

그가 죽은 후에 보니 그의 재산은 ‘ 뽕나무 8백 그루
와 전답 15경(頃) ’이 전부였다고 한다. 청빈한 공직
자로서도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촉장 마속의 막하에 있
던 진식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마속이 제갈량에 의
해 목이 베어질 때 진식도 함께 요참(腰斬)을 당했
다. 그런 악연이 있음을 감안하면서 진수가 쓴 제갈
량에 대한 인물평을 보자.

‘ 해마다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
했으니 장수로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승상으로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따뜻
하게 어루만질 줄 아니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히 관중과 소하에 견줄 만했다.’

  •  

촉나라의 인물들, 당양벌 장판파 전투의 영웅‘조운’

북방의 두 강자 원소와 공손찬이 불꽃 튀는 접전을
펼치고 있을 때, 원소진영의 맹장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이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어느 산비탈에서 말
아래로 꼬꾸라졌다. 뒤따라오던 문추가 창을 꼬나
잡고 돌진해왔다.

문추가 그를 내리찍으려고 창을 번쩍 드는 순간, 나
무덤불 속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와 그 창을 막아내
고 공손찬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신기의 창술을 펼
치며 문추를 쫓아냈다. 훤칠한 체격에 눈썹이 짙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동안의 미장부(美丈
夫)였다. 공손찬이 물었다.

“ 정말 고맙소이다. 젊은이는 뉘시오? ”

“ 저는 상산 사람으로 이름은 조운(趙雲), 자는 자
룡(子龍)이라고 합니다.”

후일, 유비 진영에서 관우와 장비에 못지않은 활약
을 하는 조운이 처음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조운은 본래 원소 진영의 장수였으나 원소가 요란
한 명성만큼 주민들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북방의 또 다른 영웅 공손찬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공손찬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 젊은
장수를 요직에 기용하지 않고 후진에 배치한다. 너
무 젊은 데다 아직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유
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 무렵 공손찬을 도우
러 왔던 유비는 조운을 한번 보고, 마치 천생배필을
만난 청춘남녀처럼 첫눈에 반했다. 조운도 유비를
한번 보고 ‘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평생 따르고 섬겨
야 할 주군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후일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하자, 조운은 정처 없
이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유비를 만나게 되고, 그때
부터 유비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끝없는 충절과
눈부신 무용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조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니뭐니 해도
당양벌의 장판파 전투이다.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쳐들어오자, 유비는 그를 따
르는 피난민들과 함께 조조의 군마에 짓밟히며 유
표의 큰아들 유기가 있는 강하로 쫓겨 가고 있었다.

그때, 유비의 처자가 적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조운은 단기(單騎)로 조조의 대군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창날이 너덜너덜해지
도록 적병을 베어 넘기며 유비의 아들 ‘ 아두 ’ 를 구
해온다. 이때 그가 죽인 조조군의 장수만도 십여 명
이었다.

언덕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조조까지도 감탄
을 금치 못했다. 그때부터 ‘ 상산 조자룡 ’ 하면 장판
파에서 조조의 대군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달리던 그 눈부신 무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
로 인해 조자룡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후세에 알리
게 되었다.

또, 유비와 정략결혼한 손권의 여동생 손 부인이 오
로 돌아갈 때 몰래 아두를 데리고 떠나자, 조운은
오의 계략을 간파하고 재빨리 뒤따라가서 아두를
빼앗다시피 다시 찾아온다. 그는 후일 촉의 후주(後
主)가 되는 아두를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조운은 노장군 황충과 함께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
앗는데도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촉주 유선에게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
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조운의 나이는 이미 칠
십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제갈량은 정벌군의 진용
에서 조운을 제외했는데, 이를 알게 된 조운은 불같
이 노하며 군막에서 뛰어나와 따지듯 외쳤다.

“ 내가 비록 늙었다 하나 선제 이래 선봉을 맡지 않
은 적이 없소이다. 대장부가 싸움터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을 터인데, 어찌 나를 뺀단 말
이오. 나를 선봉으로 써주지 않는다면 이 주춧돌
에 머리를 짓찧어 죽어버리겠소! ”

끝없는 노익장이요, 한없는 충절이었다. 결국 제갈
량은 그에게 선봉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위군에서는 조조의 부마인 하후무가 총대장이었고, 서량대장군 한덕이 용맹무쌍한 네 아들과 함께 선
봉을 맡고 있었다.

조운과 맞붙은 선봉대장 한덕은 네 아들을 차례로
보냈으나 모두 조운의 창에 찔려 죽고 마침내 그 자
신마저도 조운의 창에 모가지가 떨어지고 말았다.
서전에서 적의 선봉장 5부자를 차례로 물리친 조운
의 승전보에 힘을 얻은 촉군은 사기충천하여 마침
내 위군을 무찌르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는
개가를 올렸다.

그는 한평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
도 진심어린 충절을 다하며 살다가 칠십이 넘어서
병사했다. 조운의 죽음을 전해들은 촉주 유선은 지
난날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며 목
놓아 울었고, 제갈량은 쓰러져 흐느끼며 이렇게 탄
식했다.

“ 이제 촉은 기둥 하나를 잃었고, 나는 팔 하나를 잃
었다.”

제갈량에게 조운은 남다른 장수였다. 관우와 장비
는 초창기부터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 데다,
둘 다 개성이 너무 강하여 제갈량이 다루기에는 좀
버거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운과는 늦게 유비진
영에 합류했다는 공통점도 있었고, 또 조운의 성격
도 무장치고는 다소 온유한 편이어서 제갈량과는
호흡이 아주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런 조운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우리 속담의 ‘ 조자룡이 창 들고 서있는 듯하다.’ 는
말은 ‘ 감히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다.’ 는,
즉 완벽한 경호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조운이
중국사를 통틀어 몇 손 안에 꼽히는 창술의 대가이
기 때문에 만들어진 속담이리라.

또, ‘ 조자룡 헌 칼(창) 쓰듯 ’ 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
고 있는데, 이것은 조운이 장판파의 싸움에서 창날
이 너덜너덜하도록 창을 쓰고 나서, 다시 적군에게
서 뺏은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
기던 눈부신 무용에서 나온 말이다. ‘ 아주 익숙하게
사용한다.’ 는 뜻과 함께 ‘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혼자 적진에 뛰어 들어 주군의 아들을 구해올 만큼
투철한 충성심과 걸출한 무용을 갖춘 조운 자룡, 천
수를 다한 후 온전한 몸으로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
다. 동료인 관우와 장비는 둘 다 참수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생각하건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장수들 중
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운만큼 모든 것을 골
고루 갖춘 장수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참으로
복 받은 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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