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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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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모아모아 2019. 9. 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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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안동호 건설로 산중턱에 낸 호젓한 길을 따라 입구에 가면, 말에서 내리는 하마비 앞에 정문이 있고 조금더 걸어가면서 안동호와 습지를 오른쪽에 붙이고 가는 풍광에 벌써 숙연해 집니다.

입구에 있는 열정 이란 우물입니다.
사람은 이사를 가도 우물은 이사 할 수 없고.. 변함없는 선비의 정신을 입구부터 군기를 잡았던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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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입구 에서 진도문 과 그뒤 공사중인 전교당 까지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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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운정사 는 선비들이 기숙사로 농'隴'은 언덕을 뜻하니까 구름언덕의 기숙사라고 해석해도 되는지.. 집의 모양을 '工'자 모양으로 하여 공부에 집중하도록 했는데, 방의 크기는 가로 약 2m 세로 약5m정도 인데 여기서 많은 선비들이 꾸겨자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퇴계선생은 당신의 거처 와 이곳이 넓다고 불만 이셨다니...
위 사진은 선비들의 휴식처인 관란헌 뜻대로보면 난을 관망하는 마루 란 뜻인데, 원전은 맹자님 말씀에 난을보는 태도에 대한글에서 가져온것이라, 쉬는것도 군기가 들어야~~ㅜ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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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 은 열씨미 공부하는 시습재
공자님 말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해석하는데 여기서 때때로는 띄엄띄엄 쉬었다가 가 아닌 틈나는 대로 라고 봐야 됩니다.
여기에 퇴계선생은 습자의 날일'日'에 획을 하나 더 넣으셔서 매일 더 매일 이란 의미를 담으시지는 않았는지.. 아주 스파르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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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대로 초가삼간이 퇴계선생의 거처이던 도산서당 입니다.
거처인 왼쪽은 완락재, 오른쪽은 암서헌 으로 명명 하셨습니다.

여기도 집이 넓다고 지적하신걸 훗날 지역 관료가 마루를 옆으로 넓히고 완락재옆으로도 칸을 넓힙니다.

을사사화에서 화를 모면하시고 낙향하신뒤 세우신 도산서당.
도'陶':는 질그릇을 뜻합니다.
일설에 옆산에 질그릇을 구워내는 가마가 있었다지만, 그보다는 질그릇을 빗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가르쳐서 성인을 만든다는 정신을 함축했다는것이 정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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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헌 바로 앞의 조그만 연못인데
조선의 우주관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사상을 포함하여, 나무기둥들도 고려처럼 화려하지 않고 사각으로 건축됩니다. 방 자가 여기서 네모반듯하다는 의미로 선비의 태도를 나타내는 모양입니다.

같은 이유로 조선의 건축기둥은 반듯하게 네모로 되어있다고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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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실 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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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실 우측 입니다.

모두 책을 보관하는곳인데
약 4,000권 가량을 보관했는데 당시 책이 일반에는 보급이 안되어 도서관의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통풍을 위해 누각형태로 지었습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으로 주자의 4언시에 만권의 서적이 내게 광명을 비추는 구나 라는 구절을 인용 했다고 하니, 저런문구 모르는 선비들은 뒤통수좀 맞았겠습니다.

광명실 에서 마당으로 오르면 동서 양편에 선비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건물로 전교당 의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홍의재 '弘' 크고 '䝘' 굳센 집 이란 뜻인데 원전이 있는지는 모르고 굳세고 큰뜻을 품으란 의미 같습니다.
(설마 웨이트 트레이닝 실은 아닐테고 ㅎ)

맞은편 박약재 넓게 맺는다? 학문의 연결하는 방법을 의미할까요? 우리밴드도 넓게 서로의 인연을 맺는데^^

강학 본관 출입문인 진도문
이곳을 지나면 전교당이 지요
아쉽게도 공사중이라 전교당 내부는 못 보았습니다. 전교란 공자의 법 과 교를 밝힌다는 뜻이라는군요.

전교당 우측으로는 한존재 란 방이 있는데 이는 헛된생각을 막고 성심을 보전 하는방 이란 뜻이랍니다. 아마 공부하다 딴짓하면 끌려가서 얼차려시키는곳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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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장서각 내부 입니다. 목판을 보관하며 서적을 인쇄해주는 곳 이었지요. 소수서원을 비롯하여 이지역의 목판본을 안동에서 기증받아 보관중인데, 족보를 포함하여 거의 팔만개를 육박할거라고 합니다. 해인사의 대장경 수를 넘을수도..

  • 출처 - 재미있는 세계사

서원 맞은편에 시사단

정조께서 퇴계선생의 인품을 기려 이 곳 에서 특별과거를 치루었는데 약7,300명이 응시하고 3,000명 이 답안을 낸 후 이중11명을 선발하고
여기에 비석을 세웁니다. 당시 이곳은 송림이었는데 지금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되고 시사단도 더 높게 변경했습니다.

통상 과거는 지방 의 예비시험 부터 임금면접까지 총 5회를 치루어 3명을 선발하는데 위 과거는 단 한번에 4회분을 퉁쳤는데 그 이유를 대략 적어봅니다.

율곡선생은 제자들에 의해 서인으로 분류되어 율곡의 기호학파는 서인, 퇴계의 영남학파는 동인이 됩니다.
사화를 통해 훈구세력과 싸움 이후 동서의 대립이 격화되다가, 광해군을 옹립한 북인(동인에서 나뉜)이 세력을 쥐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폭망합니다.
이후 동인 영남학파는 과거에도 차별 받으며 무려 100년정도를 지나다가, 정조 즉위 후 서인들의 사도세자 주살을 벌하라는 청을 올렸다가 장살에 죽습니다. 아직 정조가 정권이 공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시 10년 가량 지내면서 서인들의 동인탄압이 이루어지자, 서원들이 통문을 보내 만인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상소를 접수한 관리가 내용의 심각함(사도세자 죽음에 관련자 처벌 및 영남차별 철폐)을 보고 접수를 거부하자, 영남출신 하급관리에게 만인소를 보시라는 상소를 올립니다.(이들이 직접 못 올리는것은 관료는 직접 상소가 가능하고, 벼슬이 없으면 담당자에게 접수 하드록 하는 제도 때문입니다.) 정조는 신하의 상소를 받고 만인소를 보려하자, 서인들은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거부하고
이때 정조는 "만인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란 명언을 하시고 그 상소를 보셨답니다. 부정에 눈물흘린 정조는 결국 영남유생이 그간 받은 차별을 보상하기위해 특별과거를 치루고 시사단을 세웠으며, 이때 올린 만인소를 효시로 이후 몇차례의 만인소가 조정에 상신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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