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1월 8일, 후금의 임금인 홍타이지가 아민이란 장수에게 조선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마침내 정묘호란이 발발했습니다! 그런데 후금은 갑자기 왜 조선을 침공한 것일까요? 단순히 인조정권이 '친명배금'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실제로 인조는 반정에 성공한 직후 그 명분으로 '친명배금'을 내세운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명'은 할 수 있었지만, '배금'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조선의 존망이 걸릴만큼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던 만큼, 무리하게 후금과 대립각을 세우다가는 어렵게 잡은 권력을 날려버릴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이 당시의 인조정권은 말로는 '배금'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자발적으로 후금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요. 이는 1623년에 비변사가 인조에게 건의한 내용을 보면, 당시 인조정권이 후금에 취하고 있던 정책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저 적(후금)이 만약 국경을 넘어와 말을 건다면 우리는 마땅히 '양국 사이에는 일찍이 원한이 없었다. 너희와 우리는 서로의 국경을 함부로 넘어 해를 끼치지 말고 각각의 강토를 지키는 것이 가하다. 너희들이 만약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다면 우리 또한 무력으로 맞설 수 밖에 없다. 중국 장수들이 우리 국경을 왕래하고 요동 주민들이 넘어와 중국장수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니, 너희는 이것으로써 꼬투리를 잡아서는 안된다.'고 답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들을 접대하는 등의 일은 우선 한결같이 전례에 따라 하고, 이후 문답에 관한 모든 일은 일일히 모장에게 알려 결코 숨기지 말아야합니다."
즉, 인조정권의 대후금정책은 기본적으로 후금과 원한관계를 만들지 않는 '현상유지책'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국내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워지자 애초에 후금을 적대할 여력도 존재하지 않았구요. 그럼 후금은 왜 조선을 침공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원인이 들어있지만, 크게 4가지로 살펴보면 먼저 당시 후금의 칸(임금)이 그 동안 조선에 대해 강경론을 주장해왔던 홍타이지였다는 점입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온건적이었던 아버지 누르하치가 살아있을때부터 조선을 침공하자고 수차례나 건의를 올렸을 만큼 조선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인물이었는데요.
특히 1619년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붙잡은 강홍립 휘하의 조선 군사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바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을 못잡아먹어 안달이 나있던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임금이 되었으니, 조선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재앙이 된 셈이었지요.
두번째는 홍타이지에게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만주의 여진족들을 통일한 누르하치에게는 16명의 아들과 2명의 조카가 있었는데요. 당시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아직 국가라기 보다는 부족연합체의 성격에 가까웠던 후금에서 다음 후계자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일단 자신의 장남인 추엥을 후계자로 삼았는데요. 하지만 추엥은 후금의 신료들 및 동생들과 자꾸만 갈등을 일으켰고, 더불어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에게 까지 반항을 하는 태도를 보이자 결국 그를 처형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누르하치의 8째 아들 홍타이지가 사르후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결국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다음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되지요.
하지만 새로운 왕이 된 홍타이지의 권력과 위상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는 않았는데요. 심지어 그는 즉위식에서 자신보다 연장자인 형들에게 자신을 옹립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세번의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왕이 되었는데도 절을 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이때 그의 위상이 왜 이랬냐면, 누르하치는 사망하기 전에 자식들 간에 골육상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권력을 분산시켜 집단지도체제를 반포했습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명목상의 왕일 뿐, 모든 일은 후금의 유력자인 자신의 형들과 상의해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권력과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임금의 위상에 걸맞는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인(한인)과 몽골인들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후금은 활발한 정복활동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인, 몽골인 포로들을 획득하였는데요. 이 중에서도 특히 중국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중국인들을 곱게 보지않았기에 이들을 복속시키고자 탄압을 일삼았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모두 만주족 관료들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는데요. 그는 만주족 관료들이 중국인들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하고, 중국인들의 거주지역에 만주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능력있는 중국인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고 했구요. 이에따라 중국인들은 홍타이지 덕분에 후금의 관직에 진출하였고, 홍타이지는 이들을 적극 활용하므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1627년이 되자,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 침공이라는 카드를 꺼내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이때, 앞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후금의 유력자중 한명인 사촌형 아민을 조선 침공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를 총지휘관으로 삼은 이유는 그의 충성심을 실험해볼 겸, 만약 성과가 좋지 못하다면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어 처리해버릴수 있기 때문이죠!
세번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에 만주지역에서 극심한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후금 내부의 사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
《청태종실록》
앞서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많은 영토와 인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본래 유목민들이라 농작에는 크게 서툴러서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는데요.
이로인해,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식량 및 여러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받았으나 이제는 명나라와 전쟁중인 상황이다보니 명나라측에서 이들과의 교역을 끊어버리는 '경제 제재'를 가하자, 기근과 경제 제재가 겹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가 닥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후금은 명나라와의 교역을 대체할 말한 수단을 찾기 시작했는데요. 그것이 바로 '조선'이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후금은 경제 및 식량난을 타계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교역 약속을 받아내고자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마지막이자, 정묘호란의 발발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가도에 틀어박혀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입니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수차례의 시도를 하였는데요. 하지만 그럴때마다 번번이 조선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이 후방을 공격할까봐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모문룡의 존재때문에 후금에 머물고 있던 중국인들을 자꾸만 후금을 탈출하여 가도로 넘어갔는데요. 이로인해, 후금의 입장에서 모문룡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매우 성가신 존재였지요. 그래서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에 나선 자신의 사촌형이자 총지휘관인 아민에게 모문룡 제거를 최우선 목표로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즉, 후금은 눈엣가시인 모문룡을 제거할 겸 조선을 침공한 것입니다.
또한 전편에서 살펴보았던 이괄의 난도 정묘호란 발발에 일정부분 원인을 제공하였는데요. 왜냐하면, 반란이 진압되자 이괄의 일당이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조선의 내부정보를 후금 측에 넘겼기 때문이죠. 이러한 정보는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결정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준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한윤은 당시 후금측에 억류되어있던 강홍립을 만나, 인조정권이 강홍립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는 거짓말을 했는데, 이에 분노한 강홍립은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후금군의 길잡이 역활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묘호란은 다양한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에따라, 조선과 후금간의 첫 대규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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