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험난한 관직 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로 나뉘었네
(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
([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징비록.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 그 시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징비’는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사진 오른쪽 장은 서문인데, 일부가 찢겨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지는 왼쪽 장은 4월 13일 부산성이 함락되는 내용이다. 국보 제132호.
경북 안동 하회 유성룡 종가(충효당) 소장.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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