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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생활정보

삼국지 인물열전 - 평버한 군주의 표본 - 후주 유선

by 모아모아모아 2019.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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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의 인물들,
범용(凡庸, 평범)한 군주의 표본, 후주 ‘ 유선 ’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또 처해진 여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후자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삼국 모
두 수성에 실패, 단명(短命)하기 때문이다. 삼국 중
에서 가장 먼저인 이대(二代) 째에 망하고 마는 촉
의 경우를 살펴보자.

촉의 후주(後主) 유선(劉禪). 촉을 창업한 유비의 맏아들로서 범용(凡庸)한 군주의 표본 같은 인물이
다. 그는 위나 오의 경우와는 달리 치열한 후계다툼
없이 순탄하게 제위를 물려받았다. 유비는 죽으며
제갈량에게 말했다.

" 태자 유선이 황제의 그릇이 되지 못하거든 그를 폐
하고 승상께서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달라."

물론 진심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유선이 범용한 인
물임을 이미 알고 있던 유비가 미리 제갈량의 충성
을 다짐받아두기 위해 했던 말이리라. 유비는 아들
유선에게도 아래와같이 신신당부하고 죽었다.

" 승상 모시기를 아비 섬기듯 하라. 모든 것을 승상
에게 물어서 하라."

촉주 유선은 유비의 유훈대로 모든 일을 제갈량에게
맡겼다. 제갈량이 마음만 먹었다면 제위를 빼앗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선을 충심으로 받들었다. 제갈량이 위
정벌 길에 오르며 바친 출사표(出師表)는 바로 이
촉주 유선에게 바친 표문으로, 자구마다 충성심이
가득히 배어있는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제갈량이 북벌 전선에서 적장 사마의를 몰아붙이며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한번은 촉주가 조서를
보내 제갈량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기실
은 위의 첩자들이 뿌려놓은 ‘ 제갈량이 황제 자리를 뺏으려 한다.’ 는 유언비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으로선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황제의 명이라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에 돌아온 제갈량이
촉주를 배알하고 긴히 의논할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촉주가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 짐이 오랫동안 승상의 얼굴을 보지 못해 불렀던 것
이오.”

그 후 제갈량이 죽고 명장 강유가 대장군이 되어 계
속 위와 싸우고 있을 때, 촉의 조정에서는 환관 황호
가 후주 옆에 붙어서 온갖 간신 노릇을 다하고 있었
다. 또 촉주가 조서를 내려 강유를 도성으로 불러들
였다. 이번에는 강유가 반역을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들은데다, 환관 황호가 뇌물을 받고 강유 대신 염우
란 사람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기 위해 유선을 충동질
한 것이었다.

강유는 후주를 찾아뵙고 왜 불렀는지 물었다. 이번
에도 그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에 강유는 간곡하게 아뢰었다.

“ 환관 황호가 폐하 곁에서 간교하게 권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자는 속히 처단해야 조정이 평온해
질 것이며 전방에서도 아무 걱정없이 중원 평정에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촉주는 히죽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황호는 내 뒤를 따라다니며 심부름이나 하는 내시
일 뿐이오. 경은 어찌 내시 하나도 너그럽게 봐주
지 못한단 말이오? ”

오히려 황호를 두둔하며 강유에게 핀잔을 주었다.
결국 강유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지만 황제가 이
모양이다 보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제갈량
이 죽은 후 30년 동안이나 버티던 촉에 드디어 위기
가 닥쳐왔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위에서 촉 평정의 대군을 보
낸 것이다. 위의 명장 종회와 등애가 두 갈래로 군사
를 나누어 촉으로 쳐들어왔다. 강유가 전방에서 종
회를 막고 있는 사이,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성도 앞
까지 밀려들었다.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 부자(父
子)가 용감하게 싸웠으나 둘 다 전사하고 말았다.

도성이 포위되었다. 촉주 유선은 급히 대신들을 불
러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겁먹은 대신들은 모두
항복을 권할 뿐이었다. 이때 유선의 다섯째 아들 유
심이 어전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 항복을 주장하는 썩은 선비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
오. 성안에는 아직 수만 명의 군사가 있고 전방에
서는 강유가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선제께서
온갖 간난을 무릅쓰고 세운 이 나라를 어찌 하루아
침에 적에게 넘기려 하십니까? 소생은 결코 항복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촉주는 아들 유심을 기어이 밖으로 내쫓았다.
이에 유심은 처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할아버지인 유
비의 묘소로 달려가 울분을 토로했다. 그리고 스스
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유비의 손자다운 기개였다.
촉의 멸망사에서 단 하나 남아있는 빛나는 삽화이다.

이튿날, 촉주 유선은 스스로를 결박하여 여러 아들,
대신들과 함께 적장 등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원
결의 후 80년 만에, 유비의 흥한(興漢)의 꿈은 그의
아들에 의해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선은 위에 끌려가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 이름
그대로 안락하게(?) 살았다. 한번은 위의 실권자 사
마소가 크게 잔치를 열어 유선을 대접하니 촉의 구
신(舊臣)들은 모두 괴로운 표정이 역력한데, 유선만
은 마음껏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사마소
가 물었다.

“ 옛날의 촉 시절이 그립지 않소? ”

유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 아니오. 위나라의 음식이 맛도 있고 또 이렇게 잘
지내니 마냥 즐거울 뿐이오. 촉 생각은 이제 잊어
버렸소.”

그의 이 말이 회한과 대오(大悟)에서 오는 감정의
역설적인 표현이었거나, 살아남기 위한 처세용 답변
이었다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겠으나, 그의 경우
엔 본심 그대로였으니….

혹자는 유선이 원래 총명했으나 어렸을 적에 당양벌
에서 조운이 그를 구해왔을 때 유비가 그를 땅바닥
에 내던지는 바람에 뇌를 다쳐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유선의 하는 짓이 하도 안쓰러워서 그
렇게 갖다 붙여본 것이리라. 어쨌거나, 그는 멍청한
덕분에 위나라에 와서도 편안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
하고 죽었다.

모름지기 큰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창업이나 수성
에 힘쓰는 것 이상으로 자식농사에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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