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딸이 신문왕 비가 된 것을 보면 왕과
가까운 혈족이었을 것이다.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장군이다.
661년(문무왕 1) 7월 고구려 원정군 편성에 김인문·김진주(金眞珠)와 같이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참여해,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백제 잔민의 반란 진압이 급선무였고, 또한 군량미 보급이 주 임무여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서 김인문·김흠순(金欽純)·천존(天存)·
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
양도(良圖)·개원(愷元)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전국의 총관과 병마를 동원해 고구려 정벌을 떠났다.
그 해 9월 평양성을 함락했으며, 출정의 공으로 파진찬(波珍飡)이 되었다. 곧이어 소판(蘇判)으로 승진했으나, 그 뒤의 기록은 없다.
신문왕비가 된 딸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681년(신문왕 1) 8월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 주살되었다. 곧이어 그 딸 신문왕 비도 폐출되고,
신문왕은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모반 죄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김군관(金軍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신문왕의 교서 내용뿐이다. 즉,
왕의 장인으로서 역모를 했으며,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병부령인 김군관이 처형된 것을 보면 상당히 큰 사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신문왕의 전제 왕권 확립이나 제도 정비 및 율령 정치 구현의 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휼국사(不恤國事)나 수명망구(授命忘軀) 등 7세기 이후 더욱 강화된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과 투철한 국가관이다.
딸이 신문왕과 혼인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가문의 기록은 없지만 유력한 가문의 진골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왕의 장인인 김흠돌은 반역을 일으켜 처형되고
그 딸은 궁에서 쫓겨났다.
반란의 이유나 과정 등 상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지 못한 딸이 폐위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난을 일으켰단 견해도 있었지만,
무열왕, 문무왕을 이어 진행된 왕권강화에 맞선 귀족세력의 반발로 보는 견해가 다수인 듯 하다.
또는 반대세력이 김흠돌을 제거하기
꾸민 일일거라는 설도 있다.
왕의 장인 씩이나 되는 사람이 반란을 꾸미고 잡혀 처형된 사건의 기록이 너무 적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브캐스트
네이브블로그
'유용한 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거리춤축제 2019 (0) | 2019.08.28 |
---|---|
♡당신이라면 어떻게 ? ♡ (3) | 2019.08.27 |
<소금 활용법 20가지> (2) | 2019.08.27 |
손자병법 - 현대인의 필독서 (0) | 2019.08.27 |
당신부터 먼저 행복 하십시요 (0) | 2019.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