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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모아모아 2019. 8. 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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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최초의 대격돌! : 페르시아 전쟁 (BC 492년 ~ BC 448년) ④


『이오니아 반란과 1, 2차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에서 진격하는 그리스 군', 조르주 로쉐그로스]



1. 오리엔트 세계로 향하는 관문, 이오니아


트라키아에서 아테나이 군을 궤멸시키기 직전까지 몰아부치던 페르시아 군을 서둘러 철군하게 만든 '이오니아로부터 온 메세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앞서 이오니아라는 지역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오니아(Ionia)는 지금의 터키 그러니까 소아시아라고 불리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중에서도 중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일컫습니다. 이오니아는 북부로는 트로이아(Troia)아이올리아(Aiolia), 남부로는 도리스(Doris)와 면해있는 지역으로, 에게 해로 연결되는 긴 서부 해안과 그 배후로 완만한 산과 구릉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녹색이 이오니아 지역]



본래 이 지역은 BC 18세기 무렵부터 히타이트의 영토로써 '아르자와(Arzawa)'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BC 12세기, '바다민족'의 침입으로 히타이트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도리스 인들의 침입을 피해 헬라스 본토에서 도피해온 이오니아 인들이 이 곳에 정주하면서 '이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오니아 인들이 주로 정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이유로 고향을 등진 많은 헬라스 인들이 이 곳으로 유입되면서 각기 다른 정치적 집단들이 구성됩니다. BC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오리엔트 지역과의 무역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오니아는 상업과 무역의 메카로 급부상합니다. 그리고 BC 10 ~ 9세기에 걸쳐 상업과 무역의 거점지가 되는 몇몇 도시들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들이 자생하게 되는데, 포카이아(Phokaia), 에페소스(Ephesos), 콜로폰(Kolophon), 레베도스(Lebedos), 테오스(Teos), 키오스 섬(Kios)과 사모스 섬(Samos) 그리고 밀레토스(Miletos) 등이 대표적입니다.

전술했듯이 이 지역은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헬라스와 오리엔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일찍부터 오리엔트 세계의 문명과 문화와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경제와 기술 및 문화 예술 분야는 물론, 철학과 역사학, 지리학 등의 학문 분야에 있어서 오히려 헬라스 본토보다 선행되었습니다. 특히, 이오니아는 탈레스(Thales),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등 이른바 '밀레토스 학파(Milesian school 또는 이오니아 학파)'로 불리는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 [주1] 학파의 고향이자 본산이기도 합니다.

BC 6세기 중반까지 아테나이, 코린토스, 테바이, 라케다이몬 등 헬라스 본토의 폴리스들은 이오니아 주변에 식민시를 건설하여 이오니아의 폴리스들과 활발한 교류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서진정책에 의해 소아시아 일대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의 손에 떨어진 가운데, BC 500년, 이오니아의 폴리스들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고 맙니다.



2. 전쟁의 발단, 이오니아 반란 (BC 499 ~ BC 494)


BC 499년, 페르시아 군이 트라키아에서 밀키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군을 한창 몰아부치고 있을 무렵, 이오니아로부터 온 전령이 급한 전갈을 전합니다. 전갈의 내용은 "밀레토스 시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함!"이었고, 페르시아 군은 부랴부랴 짐을 꾸려 이오니아로 출발합니다. 페르시아에게 이오니아는 일종의 교두보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오니아를 사이에 두고 헬라스 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었던 지라, 이 곳에서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면, 헬라스 인들에게 오리엔트로 진입하는 관문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었죠. 따라서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이오니아는 반드시 지배권을 유지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같은 시각 이오니아에서 에페소스와 더불어 가장 발전한 도시였던 밀레토스에서는 밀레토스의 귀족이자 정치가였던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가 페르시아 총독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레베도스, 콜로폰, 테오스, 스뮈르나(Smyrna) 등 인근 소도시의 무장세력들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 등 헬라스 본토의 폴리스들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할 경우, 페르시아 군은 헬라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 자명하다는 논리였던 것이죠.

이에 라케다이몬은 페르시아 군의 규모에 대해 크게 우려하여 지원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아테나이와 에우보이아 섬의 폴리스 에레트리아(Eretria)는 이오니아 반란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함대를 밀레토스로 급파합니다. 그러나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 내부에서 지원의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바람에, 대략적으로 30여 척의 작은 규모의 함대만을 파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타는 사르데이스 시]



밀레토스에 집결한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의 함대는 곧바로 반란군과 합세하여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총독이 기거하고 있는 사르데이스(Sardeis)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페르시아 군과 격돌했는데, 이 과정에서 퀴벨레(Kybele) 사원과 여러 신전들 및 가옥들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페르시아 군의 기병대와 인해전술에 퇴로마저 차단당하고 맙니다. 결국 헬라스 지원군-이오니아 반란군은 2/3의 병력을 잃고 간신히 도주합니다.


이후 헬라스 지원군-이오니아 반란군은 퀴프로스(Kypros)와 헬레스폰토스 해협(Hellespontos,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 일대를 장악하며 고군분투하지만, 모두 패퇴하고, BC 494년, 키오스 섬과 사모스 섬 등 이오니아의 주요 섬 나라들을 매수하는데 성공한 페르시아 군과 라데 섬(Lade)에서 격돌하지만, 대패함으로써 반란은 무위로 끝이납니다.



3. "흙과 물을 바쳐라!"


반란이 진압되자, 다레이오스 1세는 반란을 도운 아테네와 에리트레아에 대해 격분합니다. 그는 일단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위 중 한 명인 마르도니오스(Mardonios)를 이오니아의 임시 총독으로 임명하여 파견합니다. 그리고 이번 반란을 계기로 헬라스 본토에 대한 정복을 계획합니다.

이에 앞서 다레이오스 1세는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는 물론, 모든 헬라스 본토의 폴리스들에 사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복종의 상징적인 의미로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너희 흙과 물을 내게 바쳐라!"

이에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퓌드라(Pydra), 메타니아(Methania), 아이가이(Aigai), 펠라스(Pellas) 등 트라키아 인근의 폴리스들이 복종을 약속했고, 테바이와 테살리아 지방의 라리시아(Larissia), 카스타나이아(Kasthanaia), 파르살로스(Phasrsalos),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와 아르고스 등이 중립을 선언하는 한편,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 그리고 라케다이몬은 사신을 처형해버리는 것으로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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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 중에서, 페르시아 사신을 처형하는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여기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나이에는 민주화 개혁이 있기 전에 참주정치를 폈던 페이시스라토스 가문이 있었습니다. 페이시스라토스 가문의 마지막 참주 히피아스는 라케다이몬의 지원을 받아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파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는데, 민주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히피아스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망명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아테나이가 항복을 한다면,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히피아스를 아테나이의 총독으로 파견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그는 자신들을 내쫓은 민주정의 주역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유로운 민주정을 맛본 당시 아테나이 인들은 저마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결사 항전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의 복종 거절은 결국 페르시아 군과의 전쟁을 야기시키게 되었고, BC 482년, 마침내 페르시아 군은 헬라스 본토를 향해 진격합니다. 바야흐로 동서 두 문명의 첫 대규모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 발발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위쪽 화살표가 페르시아 제국군의 1차 원정, 아래쪽 화살표가 2차 원정]



4. 제 1차 페르시아 전쟁 (BC 492)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사위인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한 함대를 아테나이를 향해 진격시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통과하여 수륙 양쪽에서 헬라스 본토를 향해 진군합니다. 이 과정에서 트라키아가 페르시아 기병과 보병에 의해 쑥대밭이 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해군은 아토스 곶(Athos cape)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의 1/3 이상이 고래밥이 되고 맙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때 페르시아 군은 300여 척의 전함과 약 2만 여명의 병사들을 잃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인 마르도니오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더이상의 원정이 힘든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페르시아 군은 다음을 기약하며 되돌아 갑니다.

여기서 학자들간에 이오니아 반란으로 인해 발생한 페르시아 군의 첫 원정을 1차 페르시아 전쟁으로 보는 견해와 2년 후 '마라톤 전투'로 유명한 두 번째 원정을 1차 페르시아 전쟁으로 보는 견해로 나뉩니다. 저는 첫 원정을 1차 페르시아 전쟁으로 보는 견해를 따르겠습니다.



5. 제 2차 페르시아 전쟁 (BC 490)



BC 490년, 다레이오스 1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2차 헬라스 원정에 나섭니다. 2년 전 1차 원정 당시, 아토스 곶에서 뜻밖의 폭풍을 만나 상당 수의 병력을 잃은 그는 이번에는 이오니아 쪽에서 에게 해를 가로질러 곧바로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로 향합니다.

2차 원정에 나선 페르시아 군은 막강한 페르시아 정예 기병대를 주축으로, 메디아 인, 박트리아 인, 소그디아나 인 등 멀리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까지 징집한 경장보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헤로도토스는 그 수를 500여만명으로 적고 있지만, 이는 거짓이고, 당시 페르시아 측의 배편을 통한 병력 수송의 한계와 상륙지였던 마라톤 평야의 넓이로 보아서 2만 명을 넘기지 않았을 거라 추측됩니다. 아무튼 페르시아의 대군은 600척의 함대에 몸을 싣고 에게 해를 건너왔고 오는 도중 낙소스(Naxos)와 델로스(Delos)를 차례로 정복하고 에레트리아를 짓밟은 후, 마침내 아테나이가 있는 아티카 반도의 마라톤 평야(Marathon)에 진을 쳤습니다.


한편, 페르시아 군이 마라톤 평야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테나이 인들은 군사 강국인 라케다이몬에 급히 전령을 보내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라케다이몬은 지원은 약속하나, 현재 축제 중인지라 11일 후에나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답변합니다. 라케다이몬은 축제 기간에는 전쟁이나 파병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법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테나이 인들은 성벽 뒤에서 라케다이몬 군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마라톤 평야로 병력을 내보내 맞설 것인지에 대해 격론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 사이 페르시아 군은 여유있고 느긋하게 진지에서 기다리면서 아테나이 인들에게 항복을 종용합니다.


마침내 명장 밀티아데스의 설득으로 해안 지역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한 아테나이 인들은 칼리마코스(Kalimakos)를 총지휘관으로 하고, 밀티아데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아리스티데스(Aristides)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최정예 중장보병 5천 명과 경장보병 5천 명의 병력을 마라톤 평야로 급파합니다. 당시 중장보병이 펼친 전투대형인 '팔랑크스(Phalanx)'라 불리는 밀집방진은 각 중장보병들이 8열 종대로 서서(상황에 따라 종대의 열수는 변경이 가능했음) 왼손으로는 방패를, 오른손으로는 장창을 들고, 왼쪽 팔꿈치로는 옆 병사의 자세를 지지해주며 대열을 유지하여 탱크처럼 적진을 돌파해나갔습니다.

그러나 '팔랑크스'는 방어력과 근거리 공격력에서는 강력했으나, 40Kg이 넘는 무거운 병장기를 착용한 데다 항상 대열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빠른 기동력과 원거리 공격력에서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물론 경장보병도 있었으나 이들은 중장보병을 보조해 주는 역할 정도여서 실제 전력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밀집방진은 기병대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었죠.


여하튼 해안 내륙의 언덕에 진을 친 아테나이 군은 페르시아 군의 전열을 파악해보기 시작합니다. 약 1만 5천명의 페르시아 경장보병들이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때 밀티아데스 눈에 특이점이 포착됩니다. 하나는 페르시아 기병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 하나는 페르시아 경장보병들의 후방으로 넓은 습지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첩자를 통해 페르시아 기병대가 함대와 함께 왼편 해안선을 끼고 돌아 직접 아테나이 시(市)를 공격하러 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테나이 주력군을 마라톤 평야로 유인하여 잡아두는 동안, 기병대는 우회하여 아테나이 시를 직접 공격한다는 것이 페르시아 군의 전략이었던 것이죠.



3.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


밀티아데스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아테나이 시에 당도하기 전에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의 경장보병들을 격퇴하고, 서둘러 아테나이 시로 돌아가 기병대를 막아야하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시간 싸움인 것이었죠.

"우리 측 중장 보병이 5천 명이고 저들은 1만 5천 명. 대신 우리는 중장보병이고 저들은 경장보병이다. 전술만 잘 짜면 이긴다!"

밀티아데스는 전체 팔랑크스 대형을 기존의 중앙 돌파 전술 대형에서 '양익(兩翼) 포위 전술 대형'으로 바꿔 재편합니다. 훗날 카르타고(Carthago)의 한니발(Hannibal)이 칸나에 전투( Battle of Cannae)에서 로마 군(Roman Region)과 맞서 싸울 때 이 전술을 응용한 대표적인 전술입니다.

[양익 포위 전술]



'양익 포위 전술'은, 주력군을 좌우 양쪽에 포진시키는 한편,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구성된 가운데 병력으로하여금 적의 중앙 병력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좌우 병력으로 적진을 좌우에서 빠르게 격파하여 안쪽으로 들어가 적 중앙 병력을 포위, 압박하는 전술입니다. 이때 포위당한 적 중앙 병력은 말그대로 괴멸하게 되는 것이죠.

밀티아데스는 기동력이 강한 중장보병들만을 모아서 좌우에 팔랑크스 대형을 유지하도록하고, 가운데는 남은 중장보병과 경장보병들을 길게 횡렬로 늘어뜨려 세웁니다. 그리고 천천히 페르시아 군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합니다. 양 군간 거리가 약 1.4Km에 이르렀을 때 밀티아데스는 중앙은 서서히, 좌우익은 빠르게 전진 속도를 증가시킵니다. 이 모습에 페르시아 군은 유유자적합니다. 기병도, 궁병도 없이 속도를 내며 전진해오는 적군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이죠.


그러다가 아테나이 군은 페르시아 궁병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자 대열 전체가 속도를 배로 높이며 적진을 향해 공격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아테나이 군의 좌우익 주력군이 페르시아 군의 좌우익을 들이칩니다. 무쇠같은 아테나이 중장보병의 공격에 페르시아의 경장보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고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립니다.

아테나이의 중장보병들은 페르시아 군을 마치 탱크처럼 양쪽에서 중앙으로 몰아쳤고 중앙의 지원병력들은 전진하며 페르시아 군의 중앙 앞머리를 두들겼습니다. 반원형으로 포위된 페르시아 군은 말그대로 아테나이 군에 의해 학살당합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의 병력들은 혼비백산 진지로 달아나다가 뒤쫓아온 아테나이 군에게 목숨을 잃거나 습지대로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물귀신이 되고 맙니다.

  • 출처 - 역사랑 놀자

 

[마라톤 평야의 습지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불과 30여 분도 채 안 걸렸다고 하며, 아테나이 군의 전사자는 192명이었던 것에 반해, 페르시아 군은 무려 6400명에 달했다고 전합니다. 훗날 이 전투를 가리켜 '마라톤의 기적'이라고 평가하지만, 어떻게 보면 전력의 질적 측면에서 양 군이 대체적으로 비등한 상황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이 군 입장에서는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 기병대가 아테나이 시에 당도하기 전에, 어서 빨리 아테나이 시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죠. 이들은 약 40여 Km를 시쳇말로 뭣빠지게 달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승전보를 전하러 아테나이까지 죽도록 달려가는 병사의 이야기는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기병대와 함대보다 먼저 아테나이에 당도하게 되죠. 마라톤에서의 대패 소식을 전해들은 페르시아 군은 결국 상륙을 포기하고 되돌아갑니다. 이로써 아테나이 군과 페르시아 군이 실질적으로 맞붙은 첫 대규모 전투는 아테나이 군의 대승으로 일단락됩니다. (계속)




각주>

1.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 학파

: 고대인들은 자연을 경이로운 대상으로 여기며 자연현상을 신이라는 의인화된 초자연적인 존재가 일으키는 신비로운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철학 학파는 기존의 신화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 내부의 원리와 근원이 되는 어떤 내재적 요소들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자연철학 학파가 '밀레토스 학파'입니다.





※ 참고서적

- '역사', 헤로도토스 著, 천병희 譯, 숲출판사
-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著, 이순호 譯, 책과함께
- 'The Greco-Persian Wars', Peter green 著,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The Greek and Persian Wars, 499–386 BC.', Philip de Souza 著, Osprey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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