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알아보기
정묘호란 2편 - 전쟁 발발과 인조의 강화도 파천
*아직 이전 포스팅을 못 읽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이용해주세요^^
https://band.us/band/71042601/post/2812 (인조반정 1편)
https://band.us/band/71042601/post/2816 (인조반정 2편)
https://band.us/band/71042601/post/2827 (인조반정 3편)
https://band.us/band/71042601/post/2829 (모문룡과 이괄의난 1편)
https://band.us/band/71042601/post/2835 (모문룡과 이괄의난 2편)
https://band.us/band/71042601/post/2989 (정묘호란 1편)
압록강을 건넌 후금군은 1627년 1월 13일, 의주성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이때, 후금군은 단순히 여진족 군사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항복한 명나라 및 몽골출신 군사들까지 포함되어있었고, 더불어 지휘부에는 홍타이지의 사촌형인 아민과 함께 명나라 출신의 이영방과 조선 출신의 강홍립, 한윤도 포함되어있을만큼 다국적 군대였습니다.
한편, 의주성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자는 충무공 이순신의 조카인 이완이었는데요. 하지만 후금군이 의주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미리 변장을 하고 의주성으로 잠입해있던 한윤이 14일 새벽에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성의 무기고에 불을 질렀고, 이와 동시에 성 안에서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자, 이완은 얼마안가 사로잡혀 결국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의주성은 허무하고 함락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의주성을 함락시킨 후금군은 다음 목표로 정주의 능한산성으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했는데요. 이때 성안의 조선 군사들은 조총을 쏘며 방어에 나섰지만, 다시 장전을 하는 사이에 돌진해온 후금군에게 간단히 제압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측은 선천부사 기협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과 곽산군수 박유건이 포로가 되었으며, 성을 함락시킨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후, 성 안에 있던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 머리를 깎았습니다.
▲ 안주성에서 후금군을 막다가 순국한 남이흥
이후 후금군은 1월 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들이닥쳤는데요. 여기서 안주는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길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그 동안 이곳의 방어태세를 꾸준히 점검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던 곳이었는데요. 특히 성안의 방어 병력도 3만 6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의 방어를 담당한 평안병사 남이흥 역시, 정충신과 더불어 앞서 일어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뛰어난 무관이었구요.
후금군이 안주성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남이흥은 곧장 성밖의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후금군과의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후금군이 안주성에 도착하자 양측간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후금군이 돌격해오기 시작하자, 남이흥은 화살과 대포를 일시에 발포하여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후금군은 만주의 여진족 통일 전쟁 및 명나라와의 수많은 전쟁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군사들이었지만, 조선군은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징발되어 온 농민병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이에 후금군은 순식간에 성을 넘어와 조선군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성의 방어선이 붕괴되어 함락 직전에 다다르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결국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이흥은 죽기전에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습진'이란 진을 치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남이흥은 도대체 왜 진법훈련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왜냐하면, 당시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혹시라도 제2의 이괄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이괄의 잔당 혹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무장들을 수시로 감시했는데요.
이는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던 남이흥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혹시라도 자신의 휘하군사들을 데리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진행한다면, 인조 정권은 이것을 가지고 혹시나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는게 아닌지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에 군사들에게 제대로 진법훈련을 시켜보지도 못하고있다가 갑자기 후금의 침공을 방어하게 된것이죠.
한편, 인조는 1월 17일이 되어서야 후금군의 침공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이때 후금군의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깜짝놀라 신하들을 급하게 소집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이 모장(모문룡) 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17일 을유 1번째기사》
즉, 후금군이 모문룡을 잡으러 온 것인가, 아니면 아예 조선을 침략하기위해 온 것인가를 물은 것인데요. 인조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당시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을 제외하고는 딱히 후금과 원한을 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편에서 살펴보았지만, 인조정권은 말로만 '친명배금'을 외쳤을 뿐, 실제로 '배금' 행위는 단 한번도 한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후금의 침입에 많이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 장만 (1566~1629)
또한 당시 조선의 신료들도 인조와 마찬가지로 후금의 침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갑작스러운 전쟁에 당황하여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요. 일단 도원수 장만은 속히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군사들을 징발하고, 황해도에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하였으나, 이귀는 황해도를 지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상황을 지켜보다 곧장 강화도로 피신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더불어 최명길과 다른 신료들은 임진강을 방어해야한다고 하였구요. 하지만 인조는 이미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지방의 군사 1만명을 동원하고, 수군을 통솔하는 수사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는데요.
하지만 이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인조의 강화도 피신 계획에 반대하며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인조가 섬으로 들어갈 경우 조정의 명령이 잘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했기 때문이었죠. 더불어 인조에게 굳이 강화도로 꼭 가야겠으면, 임진왜란때처럼 분조를 설치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는 삼남(전라, 충청, 경상)으로 가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또한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기 전, 민습을 수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를 내려야 한다는 신흠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각 교서를 지어 반포했는데요. 이는 즉, 백성들을 향한 왕의 사과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1.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
2. 옥사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가 손상된 것
3. 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
4. 호패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전체 원문을 읽고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1019_006
또한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며 자책한 뒤, 기댈 곳 없는 자신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거나 혹은 군량미를 조달하여 군대에 보내는 등 제각기 힘이 되는데로 자신을 도와달라며 백성들에게 호소했는데요. 인조는 훗날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도 이러한 형식으로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는 강화도로의 파천을 결정한 직후, 장만을 방어를 담당하는 직위인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황해도로 보냈는데요. 이때 장만은 떠나기 전, 중앙군의 뛰어난 포수 1백 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해지만 인조는 이 병사들을 자신의 호위에 쓰기 위해 거절했습니다. 또한 인조가 중앙군을 자신의 호위에만 투입하려고 하자, 임진강 방어를 위한 군사수가 많이 부족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김류는 이귀의 아들인 이시백이 이끄는 수원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의 호위에 써야한다며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김류는 이렇게 반발했는데요.
▲ 김류 (1571~1648)
"적병이 이미 깊이 쳐들어 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지를 버리고 수비하지 않는다 하니, 나라를 도모하는 도리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 이귀 (1557~1633)
하지만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어, 수원의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가 아닌 강화도로 들어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보다못한 윤지경이 인조의 강화도 천도를 반대하기위해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장강(長江)의 위와 아래에 울짱[柵]을 세우고 복병을 설치한 뒤에라야 바야흐로 방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은 칼 한 자루로 천하를 평정한 이도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어찌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적은 천리 밖에 있는데 먼저 도성을 떠날 계책을 강구하신다면 사람들에게 어찌 굳건한 의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전(三殿)께서 비록 먼저 떠나 피난하시더라도 전하께서는 경솔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인조는 결국 1월 26일, 강화도로 파천하기 위해 한양을 나섰는데요. 이는 이괄의 난에 이어 인조의 두번째 파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조의 파천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강화도 이외 지역의 방어에는 보다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한강 이북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은 후금군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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