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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우산국(울릉도)의 마지막 임금 - 우해왕전설

유용한 생활정보

by 모아모아모아 2019. 9. 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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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는 동해 한가운데서 바닷길의 험함을 믿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는 신라를 우습게 여긴 우산국의 마지막 우해왕과 그 섬의 정복자 이사부에 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용 교재에도 해당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지만 고려 중기에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공도(空道)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우산국의 후예들은 모두 뭍으로 나왔고, 그 후 사람들을 섬 안에 다시 들여보냈을 때엔 뭍의 백성들이 옮겨졌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봤을 때 현재 울릉도 주민들 가운데 우산국 후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해왕 전설이 우산국 시절부터 전해온 것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후대에 다시 섬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역사의 재료에다 현지의 지형을 조합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은 사실에 가깝게 묘사돼 있다. 물론 전설은 전설로 보면 된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한다.

지금의 울릉도를 옛날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우해왕(于海王)이 다스릴 때라고 한다. 우해왕은 신체가 건강하고 기운도 장사여서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우해왕은 우산국에 와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들의 본거지인 대마도에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대마도의 왕은 우해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하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를 떠나려고 하니 대마도의 왕은 자신의 세 딸 중에서 인물도 마음씨도 뛰어난 셋째 딸 풍미녀(豊美女)가 우해왕을 따라 가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만약 왕이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굶어 죽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해왕은 할 수 없이 풍미녀를 데리고 우산국으로 돌아왔다. 풍미녀의 용모와 마음가짐이 단정하여 왕후로 삼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우해왕은 풍미녀를 왕후로 삼기로 했다.
우산국의 백성들은 우해왕과 풍미녀를 온 힘을 다해 받들었다. 그러나 풍미녀가 왕후가 된 후부터 우해왕의 마음이 전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기를 자기 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사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풍미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보물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해왕은 신라까지 신하를 보내어 노략질을 해 오도록 했다.
신하 중에서는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넣었다. 백성들은 우해왕을 겁내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지게 됐다.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를 했으나 우해왕은 도리어 그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 이 광경을 본 신하는 될 수 있으면 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지 몇 해 뒤에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
— 울릉문화원 공식홈페이지


울릉도에는 이외에도 이사부와 연결되는 전설로 사자바위와 투구봉 전설이 남아 있다. 우산국의 최후를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사부의 목우사자에 놀란 우해왕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사부가 제시한 항복조건은 우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 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그러자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전설은 남아 있다. 우해가 죽을 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신라군이 가져온 나무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고, 우해가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됐다고 한다. 한편 우해왕에 대한 또 다른 전설도 있다.

“풍미녀가 죽자 우해왕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뒷산에 병풍을 치고 백 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또 왕비를 모시던 열두 명의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뜯게 했다. ‘비파산과 학포 이야기’를 보면, 평소에 왕비가 사랑하던 학이 백 일 제사를 마치던 날 소리 높이 슬프게 울며 학포(鶴圃) 방면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 울릉문화원 공식홈페이지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출처 :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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