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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 인물 - 프란츠1세

모아모아모아 2019. 9. 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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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을 한 프란츠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자의 부군이 되었지만 궁정 사람들은 프란츠를 그리 존경하지 않았다.

극장에 들어갈 때 궁중법도에 따라
서열 2위의 대우를 받는 등,
어딜 가나 부인의 아랫서열,
하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전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조차 못 했다.
그때만 해도 아들 못 낳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었지만
이 부부는 셋째 아이까지 딸이 태어나자
온 궁정이 프란츠 1세 탓을 했을 정도니
거기에 궁중 안팎에 자기 편이 전혀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프란츠 슈테판은 죽을 때까지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썼기에 빈의 시민들은 그를 외국인이라며 비난했다.

카를 6세가 죽은 1740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명목상으로 공동통치했으나,

이것은 남편의 체면을 고려한 의전상의 명목이고 사실은 실권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허수아비 신세였다.

중요한 건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부 결정했다. 뭐, 사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도 아닌 외지인을 공동 통치자라고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부부간에 트러블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고 상속령을 승계했지만 주변국들이 여성 승계를 트집잡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오스트리아와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기를 겪었다.

카를 6세 생전 국사조칙을 승인했던 나라들이 일제히 뒤통수를 쳤던 것. 먼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대왕)은 국사조칙 승인을 대가로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렸다.

프란츠 1세는 카를 6세가 물려준 허약한 병력으로는 전쟁을 이기기 어려우므로 일단 프로이센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경험이 부족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반대했다.

그 후로도 막후에서 꾸준히 교섭을 시도해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꾸준히 프란츠를 압박했다. 방문이나 커튼 뒤에서 회담을 엿듣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프란츠가 양보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강아지 부르듯이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결국 이 사건 이후 절대로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데서 보이듯 프란츠도 국사에 재능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1년 6월부터 헝가리 여왕에 즉위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설에 감동 먹은 것과 별개로 남편과의 공동왕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왕비도 아니라는 이유로 아내의 대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마차 안에 앉아 아내의 대관식을 지켜봤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외국 군주의 자격으로 참석하면 여왕의 부군 정도는 아니어도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쿨하게 넘긴 걸 보면 애초에 오스트리아고 토스카나고 별 관심도 없는 터에 헝가리 정도는 더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프란츠 1세는 이후 헝가리 의회에도 당연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당시 돌아가는 상황은 오스트리아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헝가리를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왕권 승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제국을 이탈하려 했던 것이다. 보헤미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보헤미아 국왕자리를 조공으로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데다 합스부르크 영지의 독일인 귀족들도 대거 이탈해 바이에른에 붙어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단 남편이 원래 하자고 했던 대로 일단 프로이센과 타협해 한 숨 돌리는 동시에 바이에른을 집중적으로 조지면서 복수를 시작한다.

3년 후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의 후계자와 프리드리히 2세의 동의로 프란츠 슈테판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옹립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다시 되찾은 것은 이 자리가 동남쪽에 치우친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필수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같은 영방내 강대국도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고, 다른 선제후들은 권력이 강하니 내버려두더라도 제국내 수많은 교회령과 기사령, 제국도시에 대해 황제로서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다.

나머지 소국들도 마찬가지였고.
아울러 교회나 교황에 대한 영향력에서 '황제'로서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수장'으로서 발휘하는 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란츠는 1744년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아내의 제지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동생이자 동서지간이 되는 카를(샤를) 알렉산더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믿었던 동생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연신 털렸다. 안습. 그래도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남편의 동생,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체통을 고려해 계속 묻지 마 기용을 해줬다.

카를(샤를)은 절치부심해서 뒤이은 1756년 7년 전쟁에서는 몇 번 정도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지만,
또 결정적일 때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하는 안습함을 보여주었다.

안습한 생애 때문에 얄짤없는 데릴사위로 보이지만
이 사람은 그래도 자기 가문도 명목상으로는 물려줬다. 결혼하면서 자신의 가문인 로트링겐
(로렌의 독어식 표현)과 부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성립했기 때문.

현대에 와서는 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라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로렌 가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통이지만 유럽 최고 가문 중 하나로서 합스부르크의 위상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로렌보다는 합스부르크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후계자들이 프랑스 쪽보다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고… 때문에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오스트리아 황실에 대한 서술을 보면 적어도 일반인 쪽에서는 압도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프레더릭 모턴이 쓴 글을 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일방적으로 칭한다.

본래 유럽의 왕가는 영주로부터 비롯된지라 지배하는 지역에 따라 성이 붙는데, 명목상의 로렌 공작 작위는 루이 15세 장인에게 넘어갔다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졌고 로렌 지방은 프랑스에 뺏겼기에 굳이 '로렌'이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양자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친가와 처가나 입적 가문의 성을 같이 붙여 쓰는 게 유럽의 전통이라
정식으로 칭하자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부르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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