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세계사 -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대 지중해 최악의 세계대전 : 펠로폰네소스 전쟁 (BC 431년 ~ BC 404년) ①
『프롤로그』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의 강력한 두 맹주로 떠오른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스파르타)간에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자, 아테나이를 중심으로한 델로스 동맹국들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 간에 복잡하게 전개된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같은 헬라스(그리스)라는 큰 지역에서 펼쳐진 헬라스 인들간의 내전(內戰)이기도 했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의 원조를 받는 각각의 폴리스들간의 전쟁이기도 했으며, 상호 식민지의 이권을 두고 펼쳐진 전쟁이었다는 점에서는 근대 제국주의의 이권 다툼으로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과도 비교되는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유럽 제국주의의 공멸과 극단적인 파시즘의 등장을 불러왔던 것처럼, 펠로폰네소스 전쟁 역시 찬란했던 헬라스의 고전기 문명의 쇠퇴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단일 제국의 등장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1차 세계대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띄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과 동맹군으로 나뉘어 참여국들간에 명확한 군사적 대립각을 계속 유지했던 반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가담한 폴리스들은 같은 동맹국들간에도 끊임없이 분쟁을 계속해왔습니다.
▲ 주황색이 아테나이와 델로스 동맹국, 보라색이 라케다이몬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연두색이 중립국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이권에 따라 동맹국의 적대세력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거나, 중립국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유린하는 등의 일이 흔하게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분쟁에서 출발했다가 양대 맹주인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에 각각 지원을 요청하면서 분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여기에 각 폴리스들이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는 거시적 유착관계의 명분을 갖고 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난장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역사상 그 어떤 전쟁보다도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거의 모든 폴리스들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외부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낸 헬라스 인들이, 이번에는 각자의 이전투구의 늪에 빠져, 동족상잔을 넘어, 동지가 동지를 죽이고, 아비가 아들을 죽이며,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아녀자 할것없이 모조리 도륙을 내버리는, 유례를 찾기 힘든 대학살의 참상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후 아테네는 인구의 절반이 줄었으며, 최후의 승자인 라케다이몬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메가라, 코린토스,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등은 국력의 절반이 감소되어 그 후유증으로 인해 내란이 지속되었으며, 멜로스, 스키오네, 토로네, 플라타이아이 같은 군소 폴리스들은 전쟁 중에 아예 멸족하고 말았습니다.
이 비극적이고도 최악의 전쟁으로 인하여, 찬란했던 헬라스의 고전기 문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민주정도 헬라스 땅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후, 잠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기도 했지만, 얼마 못가서 정치적인 분열로 사그라들었고, 로마라는 신흥 제국의 출현에 의해, 다시는 옛 헬라스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지금의 우리에게, 전쟁이라는 것이 그 국가나 민족에게 얼마나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른 교훈은 현재까지도 유효합니다.
『전쟁의 기록에 관하여 : 투퀴디데스의 실증적 역사저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최고(最古)의 사료는 아테나이의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투퀴디데스(Thukydides, BC 460? ~ ??)가 집필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Thucydidis historiae)'와 역시 아테나이의 군인이자 역사가였던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BC 354?)의 저작인 '헬레니카(Hellenika)'입니다. 이 두 역사서 모두 저자들이 당대를 살았고 직접 참전했던 경험과 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집필한 최초의 실증적 역사저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앞선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비교되며, 이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현존하는 거의 모든 펠로폰네소스 전쟁 관련 자료의 기초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실증주의 역사연구의 모범으로 오늘날까지 역사학의 필독서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 투퀴디데스
투퀴디데스는 헤로도토스보다 20년 정도 후에 태어났습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오리엔트와 헬라스의 역사 기술을 처음으로 시도하면서도 치밀한 고증적 측면에서 다소 문제점을 노출했던 것에 반해, 투퀴디데스는 비교적 사실에 기초한,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된 시각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실증주의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역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는 자기자신이 아테나이 시민이자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국인 라케다이몬 측의 견해를 함께 다루고자 라케다이몬 병사를 직접 매수하여 그가 보고 들은 사실들을 곁들이는 등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투퀴디데스의 생애는 매우 불분명합니다. 부계가 트라키아 왕족이었고 거대 광산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해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생애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30대 중반 무렵으로, 트라키아의 암피폴리스에 장군으로 파견될 당시인 BC 424년부터 입니다. 아테나이와 델로스 동맹의 자금줄인 거대 은광이 있는 암피폴리스는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라케다이몬이 이 곳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고, 결국 라케다이몬 군의 브라시다스의 공격을 받은 암피폴리스는 투퀴디데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함락되고 맙니다. 암피폴리스를 잃은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로 압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책임을 물어 아테나이에서 추방당합니다.
전쟁 초기부터 전쟁사를 집필하고 있던 투퀴디데스는 오히려 추방당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추방당한 덕분에 나는 양쪽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펠로폰네소스 인들의 입장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오히려 이런 개인적인 불행이 실증적 역사 기록에는 도움이 되었던 것이죠. 따라서, 절친한 사이였던 아테나이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에 대해 실수나 약점도 그대로 드러내거나, 아테나이가 멜로스를 침략하여 씨를 말려버린 대학살극의 전횡이나,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모함 등 아테나이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가감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파피루스 원본의 일부
투퀴디데스는 호메로스처럼 전쟁을 신들의 유희로 풀이하지도 않았고, 헤로도토스처럼 운명론적인 해석을 가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사실에 입각한 기술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로마사'를 쓴 리비우스나 '황제전'을 쓴 수에토니우스, '로마제국 쇠망사'의 에드워드 기번이나, '라틴 및 게르만 제 민족의 역사'를 쓴 독일의 랑케 등 후대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정확하고 생생한 사료에 입각한 역사 기술의 첫 모범으로써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BC 411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기 7년 전에서 기록이 끝납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모호해집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위) 크세노폰, (아래) 크세노폰의 '헬레니카' 파피루스 원본의 일부
그렇다면 남은 전쟁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 알게 된 것일까요?
BC 411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BC 404년까지의 내용은 크세노폰이 쓴 '헬레니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레니카'는 BC 411년부터 BC 362년에 일어난 '만티네이아 전투'까지를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크세노폰은 투퀴디데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어떻게 끝났고, 이후 헬라스 세계는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자신의 경험과 발로 뛰어 조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투퀴디데스처럼 균형적인 시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헬레니카'를 통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헬라스 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그리하여 찬란했던 헬라스 문명이 어떻게 쇠퇴의 기로에 서게 되는지를 건조하지만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회차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헬라스 세계의 변화무쌍했던 상황을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이 두 맹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최악의 세계대전의 주인공이 되는지를 가급적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 참고서적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 著, 천병희 譯, 숲출판사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著, 허승일, 박재욱 譯, 까치
- '헬레니카', 크세노폰 著, 최자영 譯, 아카넷
- 'A War Like No Other : How the Athenians and Spartans Fought the Peloponnesian War', Victor Davis Hanson 著, New York: Random House, 2006